백두대간14구간_고치령_죽령
ㅇ. 일시 : 2010년 1월 9일 흐림
ㅇ. 산행거리 및 시간 : 도상거리 18.5km / 9시간여
ㅇ. 주요 산행구간: 고치령에서 세거리마을까지 트럭으로 이동
세거리(08:40) - 고치령(10:25) - 마당치(11:48) - 연화동갈림길(13:56) - 상월봉(16:05) - 국망봉(16:20)
- 비로봉(17:41) - 비로사 주차장(18:25)
人生似行客 인생사행객 兩足無停步 양족무정보
인생이란 길가는 나그네와 같아서 두 발을 잠시도 멈출 수 없네,
日日進前程 일일진전정 前程幾多路 전정기다로
날마다 앞으로 향해 나아가건만 가야할 길은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까.....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탄식처럼
해가 바뀌어도 대간의 발걸음은 계속됩니다.
세거리 민박집 앞에 정차하고,
트럭이 얼어붙어 시동이 걸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점점 지체되고, 고생문이 활짝 열렸네요...
조금 걸어 올라가 길 모통이에서 시산제를 지냅니다.
고치령까지 30여분을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북진하는 다른 팀을 태우고 트럭이 올라옵니다.
다행히 시동이 걸렸는지...차가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타고 올라가 고치령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차가운 기운이 코를 말립니다.
유별난 올해의 추위는
인간들이 세상에 저질러 놓은 데 대한 자연의 미묘한 응답이라네요.
전 지구적 재앙이고 마땅한 대안도 없는 실정이라 미래가 걱정이 됩니다.
목을 잔뜩 움추리고 팍팍한 오름을 시작합니다.
긴 공백 때문인지 호흡은 거칠고 급한 마음은 풀리지 않은 근육들을 다그쳐야 하네요....
어느 누군가
긴 오름질을 할 때에는 그저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이 최선이고,
봉우리 하나를 오르면, 땀 식기전에 다음 봉우리로 향해야 온기를 유지할 수 있으며,
높은 곳에 오르면, 한 잔 후에 자릴 비워주길 기다리는 눈길을 느껴야 하고,
하산 후엔, 미련없이 돌아서야 다시 오를 수 있음을 산에서 배웠다고...
그런 말을 상기하며,
무리하지 않고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헬기장을 지나 넓직한 마당치에 도착.
산행한 팀이 없어 등산로가 눈에 파묻혀 러셀로 나아가니 시간은 자꾸만 지체되고
신설이라 아이젠을 착용해도 소용이 없네요,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매바위를 지나 연화동 갈림길
1235m의 봉우리를 지나니 전면에 상월봉 능선이 이어지고, 바로 오른쪽으로 신선봉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신선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고 하는 신선봉 갈림길에서 좌측방향 내려서는 길로 진행.
작은 암봉으로 이루어진 상월산이 보입니다.
상월봉 옆에 버섯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습니다. 상월불 각자바위라 한답니다.
정상석도 없고 , 구인사 중창조사인 상월원각 대조사 박상월 스님이 9봉8문을 올라,
국망봉과 신선봉 사이에 "상월"이라고 새겨 놓아서 상월봉이라고 부른다네요.
9봉8문이란 불교에선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지만,
산꾼의 입장에서 그저 단순하게 보면,
소백산의 지맥이 아홉개의 봉우리를 이루면서
그들 사이사이의 골짜기가 여덟개의 문으로 되어 있고,
민봉에 끝이 모여 마치 접는 부채꼴 모양으로 정확하게 한자의 팔자 모형을 이루고 있다 하니,
자연의 오묘함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조망이 훌륭한 곳인데, 흐린 날씨에 눈발까지 날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국망봉 5km여 남은 지점에서 눈밭을 헤치고 앉아 점심을 먹고..
부드러운 평원에 솟은 국망봉
신라 말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태자 마의가 신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엄동설한에도 베옷 한 벌만을 입고 옛 도읍지 경주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만을 흘렸다 하여 국망봉이라 한답니다.
역사적으로도 왕조의 흥망은 반복되는 것,
개인적으로 북쪽의 김씨 왕가도 하루 빨리 망해서 백두산에서 하염없이 눈물흘리다
중국으로 망명하는 날을 보고 싶습니다.
남서쪽으로 계속 진행하여 비로봉으로 향합니다.
악명높은 소백의 칼바람에 납작 엎드린 초목들은 질긴 생명의 끈을 놓지않고,
가지마다 아름다운 바람서리 꽃을 피웠습니다.
산을 잘 모르던 시절에
그저 소백이 좋다는 말만 듣고 겨울 산에 대한 준비도 없이 겁없이 오른 산자락이었지요...
너무 추워서 죽도록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비로봉 정상석 뒤에는 조선 초 대학자인 서거정(徐居正)의 시가 있습니다.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비로봉은 치악산 비로봉만 한자로 飛蘆峰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毘盧를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원래 비로가 범어에서온 말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비로소>라는 우리말은 처음 또는 시작이라는 뜻 인데 높고 큰 산의 비로봉이 이런 의미라 한답니다.
벌써 어둠이 몰려옵니다.
눈으로 파묻힌 길을 헤쳐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죽령까지 또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확신이 없어
모두의 공감으로 나머지 구간은 다음을 기약합니다.
비로사로 하산
얼었던 몸을 막걸리 한잔으로 녹이며 여정을 마칩니다.
여행은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지만 삶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기약이 없는 여정이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정이 끝나는 순간
얼마나 깊이있고 성숙한 삶의 발자취를 남겼는지 그 사람의 삶이 평가된다고 합니다.
새해엔 더욱 열심히 걸어
천상병 시인의 표현대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다시 돌아 갈 그곳으로 가서
'지나온 길들이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게끔
건강하게 산도 많이 오르고,
밤 하늘의 보석같은 별들과 해뜨고 지는 모습을 더 많이 바라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며,
수줍고 이름없는 꽃들과 나무와 바위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희미한 길과 너른 길이 반복될지언정 불평하지 않고,
마음이 따뜻하고 선한 사람들과 어울려
많이 웃고,
일상의 자투리 시간들 조차
행복한 시간들로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