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_제주
20년 만에 아내와 다시 찾은 제주도
일시: 2006.1.15 ~ 1.16
여행일정
-.1일차: 포항출발(05:30) – 김해공항 – 제주공항 도착(09:30) – 돌공원 – 성읍민속촌
– 우도 – 섭지코지 – 해녀촌 – 서귀포 숙박
-.2일차: 성판악 도착(07:30) – 등반시작 – 사라대피소 – 진달래대피소 – 해수탕 온천
- 제주공항 – 김해공항 – 포항도착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 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정희성 시인의「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결혼 20주년으로 해외여행을 염두에 두고 내심 준비를 해오고 있었으나 큰놈의 대학입시가 잘 풀리지 않은 관계로 고민하던 차, 회사 산악회에서 한라산 산행을 한다기에 아쉬우나마 따라가기로 하니, 이번엔 작은 놈이 따라 간다고…
20년 만에 마누라와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려던 계획마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여행이 설레였던지 작은 놈이 용수철 튀어 오르듯 새벽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는 모습에 떼어두고 가려 했던 것이 미안하게 느껴지고,
베낭을 꾸려 하나씩 메고 어두운 새벽길을 나섭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내내 큰아들이 눈에 밟힙니다.
대학이 확정되었으면 지금쯤 중국땅 어디에서 온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을…
부디 바라는 대학에 합격하길 한라산에서 빌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네요.
첫 비행에 상기된 막내의 볼이 가라앉기도 전에 비가 촉촉히 내리는 제주공항에 내려서 가이드를 따라 늘 그렇듯 별 볼 것도 없고 마지막에는 물건을 강매하는 전형적인 관광코스를 돌아 카페리에 옮겨 타서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바로 앞의 작은 섬인 우도로 들어가니 꼭대기에 있는 등대가 보이고, 올라서니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사는 섬 전체의 모습이 눈앞에 들어오며 영화 ‘인어아가씨’를 촬영하여 유명해진 비양도 역시 정겹게 다가섭니다.
비에 젖어 진창이 된 길을 막내는 예전 같으면 짜증을 내었겠지만 오늘은 즐겁게 오르내립니다, 여행이 가져다 주는 기쁨인지, 한 살 더 먹은 성숙함 때문인지요…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이 20년 전 신혼여행 시절을 일깨워 줍니다.
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반드시 성공해서 남부럽지 않게 살리라 결심했던 그때,
20년이 지나 다시 바라보는 바다가 부끄러워 몰래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지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눈에선 다행히도 회한의 모습은 없는 것 같아 다행스럽습니다.
함께 인생을 살아갈 동반자가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습니다.
혈기 왕성한 30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새록새록 느끼는 것을 보면 나도 사십 대라는 것이 느껴지네요..
‘마흔 여섯을 맞이한 새해엔 바람이 동쪽에서만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붉은 햇살의 냄새를 맡았으면 좋겠습니다.
살아있다는 걸
끊을 수 없는 꿈으로 심어놓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희망을 노래하는 광대로 불리고 싶습니다….’
올해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고 다짐을 해보고, 다시 카페리를 타고 갈매기와 함께 남제주 근처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 정겨운 이와 함께 푸른 밤을 보냅니다.
성판악으로 오르는 어두운 길가엔 창백한 눈 두덩이 위로 겨울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립니다.
걱정이 앞서 준비하는 손과 마음이 바빠지며 오늘 산행은 고행길이 되리라 생각이 됩니다.
추운 새벽에 비를 맞으며 한 발만 잘 못 디디면 발 전체가 빠지는 깊은 눈길을 자꾸만 낭만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급한 마음이 재촉하는 길을 두 어 시간 오르니 눈 속에 파묻혀있는 사라 대피소가 보입니다.
아이의 속옷은 습기로 인하여 젖어있고, 그런 옷가지가 체온을 자꾸만 앗아 가고 있습니다.
화려한 설화와 오름들은 보이지도 않고, 아이의 상태로 인한 두려움이 밀려듭니다.
수많은 산행의 경험이 겨울 산의 무서움을 잘 알려주었기에……
정상등정은 포기해야 된다는 내면의 소리에 그만 눈물이 납니다. 가봐야 할 곳은 너무 많은데 언제 다시 백록담을 찾을 수 있을지….
하지만 겸손하게 자연의 가르침을 따라야,
내가, 내 사랑하는 가족이 무사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산으로 가기 전에는
늘 가능하면 삶의 자리에서 멀리, 가능한 오래 떠나 있을 생각을 하고 떠나지만,
결국은 하루도 못지나 집이 궁금하여 전화하고, 돌아 감은, 사랑하는 가족이 나의 뒤에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내게 늘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산은 일시적 도피처 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 내가 살아감은 가족이 있는 세상이겠지요..
진달래 대피소 가까이서야 비가 눈으로 바뀌더니 비로 젖은 옷은 얼기 시작하고 대피소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컵 라면을 두개 사서 저체온증 현상을 보이는 아이를 어두컴컴한 대피소 내로 데려가 마른 옷으로 갈아 입히고 뜨거운 라면 국물로 몸을 녹혀주니 화색이 돌아 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내는 꿋꿋히 잘 견뎌주고 있습니다.
강한 “한”씨입니다.^^!!!
가족의 안위에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급하고 짜증만 내는 자신에 비해 아내는 의연합니다.
나무 하나가 온전히 자라면 그 그늘아래 여러 사람이 쉴 수 있듯이…
아내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변덕스런 저를 20년 동안이나 다독이며 올 수 있었겠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지난 20년 동안의 고생은 앞으로 40년 동안 갚을 생각입니다. 그 동안 언제고 바다가 보이는 한라산정상을 꼭 손 잡고 다시 오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