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룡산_영천
여름산행의 낭만, 기룡산
눅진 눅진 장마 속이다. 언제 비가 후두둑 내릴지 알 수 없다. 모처럼 주말산행을 떠나볼까 마음 설레여 보지만 '우천시 산행 취소'라는 글귀에 베란다 문을 열고 뒷산 위에 열린 아침하늘을 올려다본다. 비는 뿌리지 않고 뿌연 안개 속에 해는 보름달처럼 떠올라 있다. 이렇게 여는 하루는 비는 오지 않고 무척 찔거라는 내 나름의 점을 치며 아침을 서두른다.
어느 산을 가던 나에게는 모두가 새롭게 만나는 산이 된다. 몇 번을 만나도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지만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얘기를 들려주곤 한다. 그래서 산으로 가는 내 가슴은 늘 콩닥인다. 오늘은 어떤 빛깔로 나를 맞아 줄까? 더 많이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사랑해야지.....
장마 속이라 그런지 몇몇의 산 벗이 전부다. 우리는 자가용 세대로 나누어 타고 영천으로 달린다. 창가에 어리는 풍경은 어지럽게 달려가고 산과 들도 휙휙 비껴간다.
들에는 어느새 한 웅큼씩 포기를 안은 벼들과, 아가의 주먹만한 과수원 풋사과들 그리고 밭에는 풋고추들이 여름의 따가운 햇살을 올망졸망 고대하며 가을을 키우고 있다.
남산 달빛 산행을 추천하고 권하던 벗들이 막상 산행을 계획하고 보니 이런 저런 이유로 신청은 겨우 여섯 명 뿐. 고향이 경주라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는 남산을 다시 현지 답사까지하며 애써 짜 놓은 계획을 변경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을 달리는 차안에서 등반대장에게 듣고 나니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들이 밀려온다.
사실 나도 은근히 달빛 산행을 기다렸다. 무엇이든지 미리 하기보다는 꼭 끝까지 미루는 내 성격 탓으로 그 마음을 전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오늘 산행을 알게 되었다. 달빛산행은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벗처럼 안타깝다.
자양면 사무소에 주차를 했다. 산아래 나무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주차 인심은 넉넉했다.
마을을 둘러보고 산 들머리로 가는 길에 우리 모두는 개구쟁이가 된다.
돌담벽에 자두, 살구나무가 보인다.
팔을 뻗어 가지를 휘기도 하고 ,짚고 가던 스틱으로 살구를 때려서 따 먹기도 한다.
어릴 때 고향 동네에 유실수가 있으면 언제나 그는 멍 투성이가 되었다.
채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기 위해 돌맹이를 던지기도 하고, 까만 고무신을 벗어 던지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면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던 단발머리 코 흘리게 시절의 흑백 사진 한 장 떠오른다.
고깔산(736)으로 가는 길은 소나무들이 들어찬 오르막이다.
바람마저 끊어져 등줄기는 금방 땀에 젖는다. 30여분 걸어가 내려다 보는 조망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영천호의 고요함은 말을 잊게 한다.
헉헉 거리며 오르는 산행에 총무가 아내 사랑을 풀어 놓는다.
오늘이 아내 생일이지만 아무 말없이 모르는 척 집을 나섰단다. 그러는 남편이 섭섭하여 잘 다녀오라는 다정한 인사를 건낼리 없었던 아내는 집으로 배달된 한 바구니의 남편 사랑인 꽃과 케익을 받고서 화답을 전송해온 모양이다.
아내가 얼마나 감동했을까? 부부가 한 평생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연애 기술도 필요한가보다.
반전 드라마를 위해 아무 말없이 집을 나설 때의 그 기분이 어땠을까.... 이렇듯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은가 보다.
바위 곁에 피어있는 노란 바위채송화, 엉겅퀴, 하얀 빛의 까치수염등 여름의 야생화들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지친 발을 쉬어가게도 한다.
특히 꽃잎갈래를 강하게 말아 올리고 암술과 수술이 길게 빼어나온 나리의 고혹한 자태는 자주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리고 마을 가까이 피는 자귀나무가 숲에 피어있다.
금실 좋은 부부 사랑얘기를 들은 탓일까. 자귀나무의 사랑이 떠오른다.
자귀나무는 화려하게 생긴 꽃도 시선을 잡지만 양쪽으로 난 잎들이 저녁이면 포개고 잠을 잔다고 한다. 낯 동안 서로 떨어져 있다가 해가 지면 제짝을 찾아 마주 포개는 자귀의 사랑이 귀엽지 않은가
자귀나무
고깔산을 넘어 기룡산(937)으로 가는 길은 신비롭다.
안개는 점점 짙어져 앞서 가는 사람은 안개에 숨어 금방 혼자가 된다.
오른 쪽을 보아도 왼쪽을 보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뽀얀 안개뿐이다.
혼자서 하늘 속에 떠 있는 섬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하고, 바다 속 깊은 곳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안개 속을 헤메임은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들은 모두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헤세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끔 전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걷는 것도 낭만적이지 않은가
기룡산 정산을 지나니 내리막길이다.
참나무들의 낙엽들이 푹신푹신 무릎을 편안케 한다.
무덤 몇 개를 지나니 경사가 심한 비탈길 내리막이다. 경사가 심한 탓에 금방 용화마을로 내려선다.
용화 마을에서 들머리까지 시메트 길을 따라 40여분을 걸어야 한단다.
다행이 묘각사 부처님의 도움으로 우리는 쉬이 자양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손 두부에 막걸리 두어 잔이 돌 때쯤 후두둑 비가 내린다. 참았던 떼보쟁이가 울움을 시작하 듯 비가 제법 내린다.
비를 맞지 않고 낭만적인 산행이 될 수 있었된 것은 함께 한 산 벗들의 은덕이라고 자랑하고 싶다. 안개 속이라 산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오붓한 산행에 개개인의 마음 속도 살짝 넘어 다 볼 수 있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