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산_단양
애절한 그리움에 젖어있는 황정산
충북 단양, 2006. 9. 19(화) 맑음
새벽 출발을 위해 급히 잠들어야겠다는 급한 마음에 들이킨 서너 잔 술이 해독되기도 전에 알람 소리는 매정하게 울어대고…….
늘상 그렇듯 잡념을 가득 안고 새벽 길을 나섭니다.
태풍 ‘산산’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농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오늘 새벽은 너무도 청명하여 산에서의 시간이 너무 행복해 질 것 같은 예감입니다.
대구-포항간 고속도로를 지나 중앙고속도로를 접어들어 감긴 눈이 꿈속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눈을 애써 비벼 뜨니 혼자서는 찾아올 수 없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산행기점에 다 달아 모두가 분주합니다.
피곤했지만, 자리를 박차고 등산화 끈을 야무지게 묶으며 산에 왔다는 즐거움으로 마음을 포장해 봅니다.
빗물이 쓸려 내려오는 골짜기 바윗길을 10여분 오르니 지금은 가 건물로만 이루어진 신라시대 나옹화상이 창건했다는 원통암에 다다르고, 습도 놓은 공기로 인하여 땀은 벌써 등줄기를 적셔버렸습니다.
나옹화상의 시조 “청산에 살라하네”가 떠오릅니다.
청산에 살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오늘은 황정산이라고 몇 년전 아내와 함께 올랐던 도락산 이웃에 있는 산입니다.
검색하여 보니 황정(黃庭)’이란 도교, 신선사상에서 옥황상제께서 근무하시는 광한루의 앞마당(신선들 조회 때 집합하는 뜰)이라는 뜻이고, 거기서 선관 선녀들이 1년에 한 번씩 도교 경전인 ‘황정경’을 낭독하는데, 글자 한 자라도 틀리면 인간세계로 귀양을 보낸다고….
따라서 하늘의 정원과 같은 아름다운 산이라는데….
바위 틈으로 자란 분재와 같은 아름다운 소나무를 지나 어느 고마운 분이 매어놓은 로프를 잡고 오르기를 수차례…
아침을 못 먹은 탓인지 기력이 떨어짐을 느끼고..
잠시 기대서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우리산하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뜨거운 기운이 솟아 오름이 느껴집니다.
힘찬 발걸음으로 황정산의 보물인 너럭바위에 다다릅니다.
고사목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옆으로 눕거나 뱀처럼 또아리를 튼 분재와 아름다운 수석이 어우러진 전시장입니다.
모진 환경에서도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모습이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움의 극치란 것을 산은 교훈적으로 보여줍니다.
나 역시 열심히 살아간다면 아름다운 노년이 있겠지요…..
곡예를 하듯 굽히고 버티고 하다 보니 몸이 다 젖기도 전에 황정산 정상에 올라섭니다.
과정이 아름다운 산은 정상조망이 별로 이듯,
황정산 역시 정상조망은 볼 것이 없었고 식사할 장소도 좋지 않아서 왔던 길을 뒤돌아 계룡산 자연성릉 비슷한 곳에서 꿀 맛 같은 식사를 합니다.
산 밑에서 불어 올라오는 골바람엔 가을이 실려 있고, 하늘은 그지없이 푸르러 자리에 누우면 그대로 신선이 될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신선봉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봉우리 입니다.
남봉을 향하여 내려서며 지도에 표기된 기차바위의 모습을 찾았으나 보이지가 않고,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선경에 젖어 있다가,
신선봉에 가까운 까마득한 절벽바위에서 주위 풍광을 감상하기도 전에
좌측 구석에 조그만 비석을 발견하고는 그만 자리에 붙어 버렸습니다.
‘황정에서 너는 산이 되었구나, 사랑한다 ㅇㅇ아’
몇 번이고 읽어 보아도 예사롭지가 않은,
까만 대리석에 새긴 글씨며, 시멘트로 정성껏 고정시켜둔 애절함이 가슴에 비수가 되어 나를 아프게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일설에 의하면 얼마 전 친구와 함께 산을 올라 이곳에서 사진을 찍다가 추락사 한 지점이라고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방은 불어오는 바람에도 조심스러운 끝없는 절벽입니다.
가장자리에서 잠시 앉아서
나와 가족,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생각해 봅니다.
삶은 혼자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지요….
사랑하는 이들이 저 속세에 나를 기다리고 있음에 오늘 이 시간이 더 즐거운 것은 아닌지..
신선봉을 지나 수리봉 정상에 오른 후에도
비석을 품고 올라 그리운 사람을 산에다 두고 간 애절한 마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멀리 소백산 비로봉과 천문대가 어렴풋이 보이고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마루금도 보이지만,
마음은 이미 산을 내려가 집으로 향하고 있음은 무엇인지…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 류시화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