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일자: 2005.06.05~06.06
지난 1월에 서천지방을 여행하고 왔으나,
너무 오래전 일이란 생각이 앞서, 다시금 지도책을 펴들고 떠날 궁리를 합니다.
6월 연휴도 있고, 휴가도 낼 수가 있었으니, 이제는 떠나지 않으면 병이 날 것이기 때문이죠….
이번엔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늘상 동경하던 변산반도를 잡았습니다.
술자리에서 만난 옛 동료들은 잘되었다는 듯이 막무가네로 따라온답니다. 술김에 한는 말을 믿어도 될른지….
그렇게 해서 또 한가득 채워서 출발합니다. 이웃들은 아마 우리가 유럽여행이라도 가는 것으로 알만큼 짐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준비성이 너무 철저해서 그런걸……
연휴의 시작이라 그런지 대전에서 광주로 가는 호남고속도로가 서서히 막히기 시작했습니다.
변산반도에 도착해서 노을을 보리란 계획은 차안에서 넓은 평야로 떨어지는 노을로 만족해야 했고, 끝없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어둠과 함께 들어갑니다.
9시가 넘어서야 예약해둔 백제성에 여장을 풀고 인근 비키니해수욕장 횟집에 들어가 주린 배를 게걸스럽게 채웠습니다.
모텔주변에는 아직도 방을 구하는 무리들이 계속 들락거립니다. 연휴 전날 예약도 없이 찾아오는 간 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되었습니다.
萬事固難審 세상 일 구절구절 알 거 뭐 있나.
醉後失天地 취하면 세상천지 다 잊어버리고
兀然就孤枕 홀로 베개 베고 잠이나 자는 거.
不知有吾身 내 몸이 있음도 알지 못하니
此樂最爲甚 이게 바로 최고의 즐거움이야.
이백선생의 말씀대로 내 몸이 있음도 모른채 마시다 보니 테라스에서 냉기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크흑!!! 나의 단점입니다.
여행의 즐거움에 또 과음을 한게지요.. 반성 많이 많이 해야 됩니다……..
도끼 눈을 하고 있는 집사람의 시선이 등뒤에 아프게 꽂힙니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모텔 바로뒤에 있는 갯벌로 나아가 소금과 호미를 가지고 열심히 갯벌을 파고 또 파봅니다.
오늘따라 맛조개는 모두 장에라도 간 모양입니다. 진땀만 흘렸습니다.
흘린 땀때문인지 술기가 가시고,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바지락 죽이 맛있다는 변산온천으로가 바지락 죽을 먹고 부안호수를 돌아 데모 잘하는 부안의 진면목을 보여준 새만금방조제를 보았습니다.
이 부안 일대는 조선 말기 부패한 조정과 밀려오는 외세 척결을 기치로 내건 동학혁명(1894)이 일어나고 난 뒤부터 근세사의 주무대로 떠오른 곳입니다.
부안에서 변산으로 가는 이정표 속에서 전봉준 옛집, 동학 농민군의 집결지, 백산, 고부, 만석보 등 익히 듣던 이름과 지명들이 보였습니다.
죽창 하나만 들고 집결지인 백산에 모여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란 말을 남길 정도의 무수한 민중이 자신의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목숨을 찬란히 이땅에 묻어버렸습니다. 비록 미완의 혁명이지만 당시 민초의 뜻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이건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진리인가 봅니다.
그러기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한 저 거대한 공사를 막은 것도 민초들의 고함이 아닐까요?
아뭍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혈세만 낭비한 정책결정자들의 행태에 입안이 씁니다.
불멸의 이순신’세트장으로 차를 돌렸습니다.
변산반도 곳곳에 흩어져 있어 모두 다 들러보기는 어렵지만, 아이의 소원인지라 석불산 영상랜드와 궁항에 있는 조선,일본배를 보기로 하였습니다.
가는 곳 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니 메스컴의 힘이 느껴집니다.
합판으로 얼기설기 만든 배가 드라마에서는 물에떠서 포까지 쏘아댔으니, 신기하다며 아이는 연신 눈을 굴려댑니다.
다음 계획대로 라면 격포에 있는 채석강, 적벽강등을 둘러보고 저녁노을을 감상한 후 숙소로 가기로 했으나, 황금연휴라 격포로 가는 길은 체증이 심해서 도로가 주차장이 되어있는 것을 본 일행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계획 변경에 전격 동의하고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노을은 다음을 기약한 채…..
지친 탓일까요? 전라도 지역은 어느 곳이나 음식이 맛이 있는데, 골라서 들러간 곰소젓갈단지내 식당은 경상도 음식보다 못했습니다.
가을 김장을 대비한 젓갈을 싣고 인근 내소사 옆에 있는 예약해둔 숙소인 ‘정든민박’집으로 향합니다.
다니는 것도 보통 힘든 것이 아니어서 모두가 지친 표정이 역력합니다.
유명세 만큼이나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민박집은 첫인상이 너무 정겨웠습니다. 직장생활을 은퇴한 주인아저씨의 세심한 공들이 여기저기 눈에 보이고, 저녁에 벌어질 전국각지에서 몰려오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도 기대가 되었습니다.
아이도 시골 할머니집 냄새가 난다며 주변을 뛰어 다닙니다.
계획이 변경되는 바람에 민박집에서 저녁을 해결해야 겠기에 곰소읍내로 가서 삼겹살이며, 야채 등을 사와서 누룽지 술이 빠지기도 전에 또 급고, 마십니다.
주인어른은 정든주 한병을 내오시고, 서울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갯벌에서 잡은 수확물을 삶아 내어 모깃불 연기속에서 또다시 왁자지껄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연일 계속되는 강펀치에 견딜 장사없으니.. 자리를 벗어나 내소사 구경을 위해 나갔습니다.
달빛속에 전나무 길이 고즈녁한 풍경을 연출하고, 그윽한 향기가 좋습니다. 내일이면 이번 여행도 끝이 나겠지요… 어둠이 내린 내소사에서 들리는 목탁소리가 정겹습니다……
아침 일찍 직소폭포를 향해 민박집을 나서고 새벽안개를 헤치며 산을 오릅니다.
산에만 오면 마음이 바빠진 자신도 언제부터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걸 다보고 느끼며 여유로운 산행을 하려고 합니다.
“걸림 없이 살 줄 알라” 는 법보장경의 글귀를 음미 해 보면서 우리 중생들을 위한 지혜로운 삶을 살라 하는 글귀가 지금도 마음에와 닿습니다.
산행도중 흐르는 물가에서 꿀맛 같은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폭포로 길을 재촉합니다.
마치 오솔길 같은 등산로 주변은 정겨운 고향의 시냇물을 연상하게 합니다. 커다란 나무들과 묘의 비석까지 뒹굴어 놓은 이곳 계곡에도 지금까지 태풍의 흔적을 지우지 못함이 한편으로 아쉽습니다.
좌측으로 계속 이어진 계곡은 얕은 물가에 이따금씩 피어있는 야생화와 뱀처럼 휘어진 버드나무 속에 고사목과 어우러진 이곳이 서양의 풍경화 사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술에 찌들은 어른들은 연신 흐르는 땀을 훔치고, 아이들은 날라 다닙니다.
폭포에 다 왔습니다.
직벽단애에서 떨어진 흰 포말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그 정점의 뒤에는 하늘금이 만들어 놓은 관음봉의 아름다운 자태가 보입니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또 하나의 신비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넉넉한 오솔길을 돌아와 약간의 오름 속에 재백이 고개에 도착 하였습니다. 바로 앞의 원암 마을의 선명한 윤곽은 드러났지만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은 아직도 운무의 방해로 묻혀 버렸습니다.
원암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여유가 있어 널려진 꽃밭에서 독백을 뱉어 냅니다. 꽃과의 처음 만남은 기쁨에서 시작됩니다. 항상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있다는 걸 망각한 채 우리네 인간들은 한치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이 들꽃도 소임을 다하고 원래의 위치대로 되돌아설 때를 생각하니 오늘의 모습이 가련해 보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떠남과 되돌아옴을 반복한다지요.
겨울 뒤에는 봄이 오고 다시 여름, 겨울이 예견되어 있듯이 모든 존재는 끊임없는 소멸과 생성, 헤어짐과 만남의 바퀴 속에서 떠남은 되돌아옴을 의미하며 되돌아옴은 또 다른 떠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떠남은?
벌써부터 조바심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