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2007년 이전

설악산_12선녀탕계곡

산하강산 2008. 12. 21. 16:59

 

2005.10.14

산행코스: 장수대-대승폭포-대승령 - 12선녀탕계곡 - 남교리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허기진 배와 피로를 마다하고 베낭을 챙겨 칠흙 같은 밤으로 나섭니다.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불타는 능선을 보지 못하겠다는 아쉬움을 미리 해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맑고 예쁘게 붉은 12선녀탕 계곡의 단풍을 보리란 기대감으로 가슴설레며 불편한 새우잠에 빠져듭니다.

 

어둠이 걷히며 차창으로 휴식기에 접어든 한계령의 쓸쓸한 황금빛이 아련한 아픔으로 솟아오릅니다. 지난주 오색을 오를 때보다 더 아름다워진 단풍이지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들어서겠지요..

 

 그러나 깎아지른 듯한 바위, 험준한 계곡, 날선 바람, 사람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앙칼진 산, 그래서 누군가 “지리산이 풍요로운 어머니 산이라면, 설악은 아리따운 아가씨 산”이라고 했듯이 오늘은 매력적인 아가씨를 만나고 쓸쓸함을 달래려 합니다.

 

 장수대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절약하기 위한 집행부의 대 침투작전이 성공하고, 대승폭포를 향하여 숲길로 들어섭니다.

천길 벼랑을 수직으로 떨어지는 대승폭포의 기개가 장쾌합니다.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해지며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합니다.

 

한시간 반 정도 팍팍한 오름에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할 즈음에서야 대승령(1360m)이 나타납니다. 이제 서북쪽 하늘은 완연한 코발트색으로 고운 단풍 빛을 보여줄 듯 맑아지고 전방으로 안산과 좌측으론 점봉산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을과 잘 어울리는 서정주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갈림길을 지나고 12선녀탕 계곡으로 향하는 단풍길로 접어듭니다.

햇살을 받아 여러 색채로 빛을 발하는 단풍에 넋을 잃고 미끄러지며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혀도 아픈 줄도 모르고 남교리까지 8.6km. 멀고도 험한 골짜기 길이지만 오늘은 힘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계곡주변의 각각의 산들이 조금씩 흘려내는 작은 물줄기가 조금씩 모여 물길을 이루고 폭포를 이루고 곳곳에 소를 이룹니다.

 

수십여 미터나 되어 보이는 장대한 폭포수가 보이고 잠시 뒤 복숭아탕에 도착합니다.

 

복숭아 처럼 생긴 비취빛 소는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듯하고, 소에 담겼다가, 다시 휘돌아 내달리는 물위엔 곱게 물든 단풍잎들이 배처럼 떠다닙니다.

 

주변의 수많은 산들이 내어놓은 한줌 물이 모여서 휘돌아 엄청난 세월동안 이렇게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을 보니 다시 한번 자신이 얼마나 한정적인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고,

앞으로는 세상을 조급하게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선배님과 폭포수 흘러내리는 바위 위에서 점심과 소주 한잔으로 오늘의 산행을 마감합니다.

 단풍이 아래쪽은 아직 들지 않아서 몽롱한 상태에서 선녀의 치마자락을 잡고 내려가야겠기에…….

 

언제와도 늘 다시 오고 싶은 곳,

내년을 또 기약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