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6. 11:24ㆍ국내여행
무더운 8월 중순에 남도의 끝자락에서….
남 들은 무더운 피서 철이니 바다나 계곡을 찾아 떠나지만,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평소 가기 힘든 반대편인 목포 해남 방면으로 말이죠,
여느 때와 같이 트렁크 뒷좌석에 가득 담고 수능을 앞둔 큰 녀석에게 용돈을 건네며 약간은 미안한 마음으로 또 떠납니다.
제가 추구하는 삶은 떠남과 돌아옴이 반복되는 떠돌이의 삶이라~
큰 아들의 서운한 눈길을 애써 무시하면서요…..
생각해 보면,
이제 같이 생활할 나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대학을 졸업하면,
어느 날,
이뿐 여자를 데리고 와서 장가 가겠다고 하겠지요……….
그 동안 다니지 못한 보상심리도 있고,
막내를 좁은 시골에 가둬두고 싶지 않아서,
양 손으로 배낭을 부여잡고 그냥 나섭니다.
큰 녀석에겐 “뿌린 만큼 거두는 것” 이기 때문에 저는 큰 욕심을 버린 지 오랩니다.
그래도 가고 싶은 학교 가서 행복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게 부모 마음인가 봅니다.
새벽안개 낀 대구-포항간 고속도로를 힘차게 달리고 빛 고을로 가는 88고속도로를 지나고,
백련 축제가 열리고 있는 서쪽으로 나아갑니다..
백련의 꽃망울과 하늘을 향해 부채 살처럼 퍼진 진 녹색 연 잎에 햇빛이 쏟아집니다.
그 위로 떠다니는 작은 새의 날개에서 여름이 익어갑니다.
법계의 온갖 덕을 갖추었다고 일컬어 지는 백련, 진흙 속에 있으면서 진흙 탕에 물들지 아니하고 함초롬 피어 오른 백련에서 깨끗하고 순결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처염상정 (處染常淨: 더러운 물에서 살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화과동시 (花果同時: 꽃이 피는 동시에 연밥이 함께 있어서 인과의 도리를 나타낸다),
종자불실 (種子不失: 씨앗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조건이 주어지면 다시 싹튼다)
진공묘유 (眞空妙有: 뿌리에서 줄기까지 속이 비어있다) 등과 같은 덕성을 지녔다는 연꽃.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연꽃 자생지라는 무안 복용리에 위치한 회산 백련지는 일제의 암울했던 시대에 조상들의 피와 땀으로 축조된 저수지로서 면적은 약 10만여평 이나 되며,
인근 250ha의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농작물의 젖줄 역할을 하였으나 영산강 하구둑이 건설된 후 사실상 농업용수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당시 저수지 옆 덕애 부락에는 6세대가 살고 있었는데,
마을에 사는 주민이 우물 옆 저수지 가장자리에 백련12주를 구해다가 심은 후 그 날밤 꿈에 하늘에서 학12마리가 내려와 앉은 모습이 흡사 백련이 피어있는 모습과 같아 그날 이후 매년 열과 성을 다해 연을 보호하고 가꾸었고 합니다.
그런 정성이 헛되지 않았음인지 해마나 번식을 거듭하여 지금은 동양최대의 백련 자생지가 되었습니다.
"꽃 중의 군자"로 불리는 연꽃은 씨 주머니 속에 많은 씨앗을 담고 있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며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그림이나 건축물, 의복, 자수 등에 연꽃 문양을 많이 새기고 있습니다.
한 켠에선 품바의 발상지라고 자지러지는 웃음과 함께 공연이 한창입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아내의 손자락을 잡아 끕니다.
옛날에 보던 “품바”가 아닌 오염된 ‘품바’ 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행객으로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지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3년 전 부터 전 이 백련지의 연꽃을 동경해 왔습니다.
역시나!!! 실망을 하고.. 차를 목포로 돌립니다.
한 때를 풍미했던 가수 이난영이 노래했던 목포의 유달산과 삼학도를 보고 싶어서지요…
유달산은 높이래야 겨우 228미터로 낮은 야산인 듯 싶지만 정작 산세의 위용은 대단합니다.
특히 기암으로 형성된 두 개의 암봉과 그 사이를 이어주는 능선은 아래서 보는 경관도 일품이지만 바다를 내려다 보며 걷는 산행 길로도 그만입니다.
유달산 정상에 서면 바로 눈앞으로 삼학도와 압해도가 펼쳐져 있고, 멀리 홍도와 흑산도로 가는 배들이 다도해의 섬들을 헤집으며 하얀 물길을 내고 있는 모습이 아스라히 멀어질 때 까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유달산을 형성하고 있는 두 개의 암봉은 일등바위와 이등바위.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 하여 일등바위, 심판 받은 영혼이 이동한다 하여 이름 지어진 봉우리들입니다.
이 밖에 유달산전체 보다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노적봉이 산 초입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순신장군이 군사가 많음을 보여주기 위해 바위에 이엉을 덮어 군량미를 쌓아, 높은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했다는 바로 그 바위입니다.
힘들어 하는 막내를 위해 나의 탐욕스런 ‘알기 위함’을 접고,
다음 목적지인 해남으로 향합니다.
원래 계획은 유달산을 내려와 이 곳 목포에서 유명하다는 ‘한미르’에서 전라도의 훌륭한 정식을 먹으려 했었는데…..
‘여행은 혼자서 하는 것’이란 말이 다시금 느껴집니다.
해남으로 가는 길에 강진에 있는 유명한 전라도 한정식 집인 ‘해태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가려고 전화를 하였으나 예약필수라는 퉁명한 목소리에 그만 지난 담양에서의 악몽이 되살아 납니다.
묻고 물어서 찾아간 집에서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비집고 종업원을 찾아 주문하려 하자 그 종업원은 귀찮다는 듯 ‘한 시간은 기다려야 되는디 우짜실 까나? ~~~~~”
다음 여행부터는 인터넷에서 소개하는 맛 집을 찾아 다니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 또다짐을 해 봅니다.
해남 읍에 도착하여 깨끗해 보이는 모텔을 잡아두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 빨라지는 발걸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읍내로 나아가 맛깔스런 전라도 음식과 소주 한 잔으로 파아란 밤을 보냅니다.
안개 낀 새벽에 맞이하는 국토의 끝자락,
큰 아들놈이 초등 4학년 때 제주도에서 건너와 임진각까지의 대장정을 시린 손을 비비며 국토종단을 시작하였던 곳, 그 때는 강하게 키우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보낸 고행 길 이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다행히 아무런 탈이 없이 자기 삶에서 큰 경험이 된 지금에사 잘 했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비집고 나오기도 하지만….
아무쪼록 아이의 인생에서 두고 두고 생각나며 아버지가 왜 저 자신을 혹독한 곳으로 내몰았는지 이해할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시인 김지하씨 역시 온갖 시름을 등에 지고 해남으로 내려와 이곳 사자봉에 서서 애절한 시를 남겼습니다.
‘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오리 햇빛
애린
나!!! ‘
아쉽게도 근래 생겨진 전망대가 땅끝의 소박함을 해칩니다.
힘들어 하는 막내를 속여 절벽아래 있는 전망대 탑으로 바로 내려섭니다.
깡총대며 계단을 재미있게 내려가는 모습이 좋아서 자꾸만 불러 세우고, 이따가 올라올 때 힘들 것이라고 은근히 암시해 주기도 하지만 수직으로 내려 꽂히는 계단을 아이는 너무도 즐거워 하며 내리고 있습니다.
땅끝의 하늘은 파랗습니다.
푸른색이란 그리움의 빛깔이라지요?
난 그리움이 가득한 파아란 하늘 빛이 제일 좋습니다.
우리의 삶도 늘 저 하늘처럼 푸르고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넓고 푸른 삶을 맑게 또 알차게 엮어 나갈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 “누구에게나 항상 그리운 이름으로 사세요”라는 말처럼 늘 물빛 푸른 그리움으로 누군가에게 기억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내려 설 때의 즐거움이 굵은 땀방울과 함께 아이의 힘겨운 오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생이란 긴 여행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고통들,
그 고통들이 아니면 우리 인생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견뎌낼 수 있는 고통들이 있기에 행복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지요?
아이가 고통을 즐길 줄 알기를 기원하며 등을 다독입니다.
순전히 에어컨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남산타워처럼 생긴 9층의 전망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 전망은 뒤로하고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팔을 벌리고 섭니다.
"이곳이 우리나라 제일 남쪽이야! 역시 남쪽이라 덥지?”
냉각된 아이에게서 그제서야 웃음이 보입니다…..
돌아가는 길에 완도에 있는 드라마 ‘해신’ 촬영장에 들렀습니다.
가 봐야 별 볼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보여주고 싶은 욕심 때문에 구불구불한 완도 해안 길을 재촉합니다.
장보고의 호연지기를 아이가 느끼길 기대하면서지요..
아이가 잘 되길 바라는 것은 어느 부모마음이나 같을 겁니다.
또 하나,
아이에게는 힘든 여정이겠지만,
여기는 제가 다산의 체취를 느껴보고 싶어 강행하기로 했습니다.
‘ 쓰르라미 소리 수풀 속에 꽂히며 산골짜기 물과 합창하던 날
다산의 손때 묻은 차탁에서 나는 님과 마주했네,
내 소리도 묻히고 님의 소리도 묻히고’ <중략> ~~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대나무와 송림이 어우러져 침침합니다.
그러나 이렇듯 은밀한 산골이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던 정약용에게는 더 안심이 되었을는지도 모르지요, 귀양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다산이라는 호를 지니고 간 것을 보면 이곳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에 남다른 감회가 있었던 듯싶습니다.
정약용은 이 곳에서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등 무려 2백30여권에 이르는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한적한 해변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20년간 속세의 일로 미처 알지 못했던 옛 임금의 대도를 깨치는 기회가 되었구나’ 하고 내심 반겼다는 이야기가 빈 소리만은 아니었던 듯싶습니다.
스물두 살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18년간 관직에 머물면서 내내 당쟁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셋째형 약종은 순교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를 거쳐 흑산도로, 약용은 포항 장기를 거쳐 1801년 강진으로 유배되고 이후 1818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경기도 마현(지금의 양수리 부근)으로 돌아갈 때까지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게 됩니다.
다산초당을 뒤로 하고 오솔길로 내려오면서 길바닥 위로 기어 나와 사람들의 발길에 닳고 닳은 굵은 나무뿌리들을 보며, 그곳에 다산의 발자취도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지막 종착지인 보성차밭으로 향하면서 풍전등화에 처한 나라를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며 삶을 초월하여 조국을 사랑했던 영웅들 생각이 내내 머리 속을 맴돌았습니다.
존경스러움과 그리고 지금 그런 사람들을 단 한 명이라도 볼 수 없다는 아쉬움, 그 분들이 그렇게 애쓰시던 부강한 나라는 제 밥그릇 채우기에 급급한 자들로 인하여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고.. 그래서 그들을 시기한 무리들, 그런 부류들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인하여 보성으로 가는 길 내내 마음이 진정되지가 않습니다.
많이 내리던 비가 여우비로 변하고 산 능선으로는 하얀 구름이 피어 오릅니다.
차 밭 입구 삼나무 길을 지나 진 녹색 속으로 들어서니 마음이 다시 평온해 집을 느낍니다.
작지만 가볼 곳이 너무도 많은 아름다운 나라, 그래서 선조들이 그렇게 부여안고 지켜온 나라를 후손인 저도 아끼면서 열심히 살아 가야 하겠습니다.
출발 할 때는 등 뒤에 해를 업어 목포에 데려다 주었는데 돌아가는 길엔 비를 데리고 갑니다.
가뭄이 심한 내 고장에 까지 따라왔으면 했는데 어둠이 져서 집에 도착하니 먼저 와서 촉촉히 적시고 있습니다.
낯선 미지에 대한 갈망은 원초적 본능이라지요,
미지의 세계에 들어서서 처음 대하게 되는 새로운 생각들은 삶의 활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이번 여행은 국토의 마지막 땅끝에서 파아란 그리움을 배웠고,
남도의 바다를 바라보며 이순신, 장보고, 정약용 선생이 부여잡고 애지중지하던 작고 아름다운 땅에 대하여 그 소중함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으며,
조금씩 지식의 폭과 깊이가 느껴지는 아이의 언행에서 보람을 느낀 여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