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1. 16:50ㆍ산행/2007년 이전
[ 은빛의 바다 민둥산 ]
졸음에 겨워 감기는 눈을 통해서 늘 보아도 신비한 7번 국도의 안개 넘어 동해바다가 보일 때쯤, 우리들을 태운 차는 휴게소에 1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부리고…..
그렇게 가야만 하는 것처럼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로 또는 커피 자판기로 발걸음들이 부산합니다.
늘상 오는 길이지만 또한 새로운 것은,
눈 앞의 바다와 띠 걸린 푸른 하늘이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에,
삶은 무료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듯 합니다.
오늘은 지난번의 화려한 선홍빛 단풍산행 대신 은빛으로 부드러운 아리랑의 고장인 정선으로 향합니다.
지나가는 길엔 가곡천이 숨겨둔 우리나라 최후의 비경지대 중 하나인 용소골이 꽃 단장을 한 채 잠에 겨운 산객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힘겨운 엔진소리에 내려다 보이는 태백준령의 한가한 농가 풍경이 너무도 정겹게 다가오는가 싶더니 어느 듯 고개를 넘자 태백시에 접어듭니다.
꾼 들에겐 뭐만 보인다고 고원지대라 온 동네 주변 산들은 불이 붙어있고, 시내 가로수 주위에는 낙옆들이 수북하게 쌓여 낙원이 따로 없고, 여기 사람들은 따로 단풍 구경하러 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또 한편으론 삶에 지친 여러 흔적들이 보여 곧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그래도 한 때는 검은 황금을 캐내는 영웅 칭호를 받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지역 중에 한 곳이었는데….
정선으로 접어들자 새롭게 번창하는 카지노사업으로 한 켠엔 최고급 위락시설들과 한 켠엔석면으로 만들어진 슬레이트 지붕이 공존하는 빈부격차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민둥산은 억새풀밭 면적은 14만평 규모로 제주도 동부 오름지대, 창녕의 화왕산, 장흥의 천관산, 포천 명성산, 밀양 사자평 등과 함께 전국 5대 억새 군락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억새 축제 장터를 지나 증산 초등학교 가는 정선선 철로 아래로 난 길로 산행을 시작하고,길이 가팔라지며 낙엽송지대가 나타나더니 발구덕 마을에 접어듭니다.
이 지역은 카르스트 지형으로 지질학적으로는 석회암 토지의 표면에서 볼 수 있는 사발 모양의 움푹 팬 모습을 띠고 있으며, 땅 밑에 큰 동굴이 있어서 지표면과 이어진 굴을 통해 흙이 조금씩 빠져 나가기 때문에 비가 오면 순식간에 구덩이가 생긴다고 합니다.
정상까지는 1시간, 밭구덕 마을에서 왼쪽 임산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가다가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섭니다.
억새축제를 위한 시설물들이 보이고 넓은 등산로 주변엔 솟아오른 잣나무들이 눈을 시원하게 합니다.
30여분 정도 몸에 훈기가 돌 때쯤 광활한 억새밭이 눈 앞에 펼쳐지고 정상이 향하는 목책안내로가 나타나더니 그만 눈앞에 정상이 금방 다가 섭니다.
실감나지 않아 두리번 거려도 보지만 아직 새우지 않은 정상 표시석이 바닥에 누워 있는 걸 보니 성취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크게 밀려옵니다.
5시간을 차를 타고 와서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등산이 끝이 나니….
하지만 이내 활짝 펴진 빛나는 억새에 서운함도 잠시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본디 꽃이 아니라 풀이건만 여기서 만큼은 억새풀이 아니라 억새 꽃입니다.
색깔이야 내장산, 설악산의 단풍의 곱디 고운 붉은 빛에 비할 수 없지만 은은한 황토 빛의 고운 맛은 단풍과는 또 품이 다르게 느껴집니다.
개체 하나로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억새풀이 떼를 지어 넘실대며 집단 미학의 절정을 만들어 내고, 바람의 흐름을 따라 차례로 흔들리며 투명한 가을 햇빛 한 조각이 억새풀 솜털을 관통할 때 토해내는 은빛 분광은 천한 미물의 것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움 가운데 최상급이란 찬사를 받을 만합니다.
억새 밭 속에서 막걸리와 함께 점심을 하고 하산 길에 접어 듭니다.
그러나 마음 급한 회원들이 밭구덕으로 향하는 단거리 직선코스로 내려서니 다른 사람들도 아무 생각없이 따라 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짧은 코스를 조금이라도 더 감상하고 싶어 능선일주 코스로 방향을 틀어 반대편에 서서 보니 일행은 벌써 다 내려간 것이 보입니다.
억새를 가장 아름답게 보려면 태양의 반대편에서 햇살에 반사되는 은은한 물결을 보는 것인데 먼저간 사람들과 이런 장관을 함께하지 못함에 아쉬움이 더합니다.
밭구덕으로 내려서니 승용차로 오른 사람들이 줄을 서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렇듯 접근이 쉽기 때문에 그렇게 인기가 좋은 것이 아닐까요?
개인적으론 영남알프스의 억새군락이 더 좋게 느껴졌습니다.
하산주에 이은 귀로,
흥에 겨운 회원들의 70년대 유행가 합창소리가 오랜만에 들려오고 늘 그랬듯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눈을 감으니 고교시절 수학여행가던 꿈을 꿀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