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21. 16:55ㆍ산행/2007년 이전
2005.10.02
[ 산행로]
오색-대청-중청-소청-희운각-무너미고개-죽음의 계곡입구-철다리- 양폭- 양폭대피소-오련폭포철계단- 귀면암- 잦은바위골입구-이호담-문주담-비선대-와선대- 설악동공원(13시간)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삶/고은
새벽 3시 오색을 들머리로 대청에 오릅니다.
물먹은 달 빛이 구름 속에서 가끔씩 얼굴을 내밀 듯하다가 사라집니다. 바람이 세차게 나뭇가지를 흔들 때마다. 낙엽이 꽃잎처럼 떨어집니다. 짧은 햇살 만큼이나 가을은 쉽게 계절을 변모시키는 듯, 벌써 대청의 오름길은 만추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의 오묘한 이치에 절로 고개를 숙일 뿐....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갈 뿐인 것을......
저마다 지니고 있는 조명등이 길게 늘어 섰습니다. 나와 같이 만추의 설악을 즐기기 위하여 전국에서 몰려온 산님들이 그 어느 때 보다 많아서 길은 곳곳에서 정체되고있습니다.
그러나 산행길은 언제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듭니다. 산행 길에서는 만나는 사람들과는 쉽게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인가 봅니다. 누구나 같은 목적으로 산길을 가며, 산은 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오늘은 대청에서 공룡능선을 타고 비선대로 내려설 요량으로 산을 오릅니다. 늘 동경하던 곳이라 정체되는 오름길에 그저 조바심이 납니다.
그런데,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습니다. 설악폭포를 지나면서부터 낙엽을 날리는 바람소리가 세차게 들리고 달무리 진 하늘에 물먹은 구름이 낮게 깔려 있습니다. 산길은 오를수록 짙은 운무속으로 빠져듭니다. 이렇게 힘들게 올라서 안개속에 헤매다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오전 7시 30분 대청봉 정상.
오색 들머리에서 4시간 30여분 만입니다. 3시간이면 오를 수 있는 곳을 정체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역시 공룡능선은 포기해야 할 것같습니다.
험한 바위 너덜을 지나 중청 산장.
잠시 산장주위에서 시린 손을 비비며 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합니다. 한기가 들어 몸이 마구 떨립니다. 체온을 올리려고 능선에서 제자리 뛰기를 해봅니다.
능선아래로 오늘 가기로 했던 공룡능선과 저편 아래 수렴동 북면으로 솟아오른 용아릉선의 험준한 봉이 탄성을 지르게 합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습니다.
삼거리 안부에서 희운각을 향하여 바위 너덜 급경사길을 내려섭니다. 내려서는 길 역시 사람들로 가득하여 진행이 어렵고 지름길로 가려는 사람들과 줄 선 사람들간의 실랑이도 보입니다. 희운각을 내려서는 계단길에 들어서야, 시야가 트이기 시작합니다.
천불동(千佛洞),
대청봉에서 내려서 비선대까지 7k여의 굽이치는 계곡을 돌아나가며, 병풍처럼 계곡을 감싸안은 기암의 바위봉이 천개의 불상이 늘어선 형상이라 해서 그렇게 불린답니다.
가히 외설악의 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희운각 09시 20분.
식사하는 사람들로 무너미 고개까지 쫒겨나, 능선에 올라서니 펼쳐진 경관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돕니다.
길은 여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북으로는 곧바로 공룡능선을 타고 넘어 마등령을 향하여 달려나가고, 오른 편 아래로 내려서면 천불동이랍니다.
천불동으로 내려서는 골짜기도 단풍으로 불타오릅니다.
계곡을 기어오른 벼랑은 죽음의 계곡으로 솟구쳐 운무 한 자락을 걸치고는 하늘 벽을 이루고, 굽이치는 골짜기를 감싸 안으며 겹겹이 앞길을 막아섭니다.
죽음의 계곡 갈림길 지나 천당폭으로, 천당폭에서 염주골 염주폭포 , 계곡을 건너질러 바위벼랑으로 곁으로 쇠 난간길이 계곡의 저 아래 꿈길처럼 걸쳐 있습니다.
이 쇠사다리 길이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험난한 계곡으로 50년대에는 천불동을 오르는 산악인들이 '천불동을 올랐다'며 자랑스러워 했답니다. 지금은 험한 계곡과 벼랑에 철 사다리로 산행로를 만들어 누구나 통행할 수 가장 안전한 길이 된 셈이죠. 그리고 설악산을 찾는 관광객까지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길로 탈바꿈을 하였지만, 골짜기마다 숨은 비경은 예나 다름없이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랍니다.
철사다리 올라서 바라본 천당폭포, 그 위로 협곡을 타고오르는 침봉들이 운무에 가려 신비경을 더해줍니다.
철계단 내려서면 양폭, 양폭곁을 지나며, 골짜기 깊숙히엔 음폭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납니다.
망경대, 고깔봉이 동양화 화폭속에 수묵화를 그려줍니다.
오련폭포지나서 용소골과 칠선골 물이 합수하여 귀면암 아래 푸른 빛 수면으로 담소(潭沼)를 이루고 , 병풍교, 잦은 바위골 들머리지나 이호담, 문주담의 명경지수가 경관을 거울처럼 비출 때 쯤, 앞을 막아서는 거대한 바위벽은 비선대로 솟아오릅니다. 설악골 들머리 비선대 높은 벼랑에는 암반을 오르는 이들이 개미처럼 바위벽에 붙어 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려옵니다.
바위 위에 드러누워 정상을 향하여 한발한발 오르는 저 사람들을 보니 큰 아들 생각이 납니다. 목표로 하는 대학을 저 사람들 처럼 정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지요..
하산 후 차고 단 막걸리 한 사발로 아쉬운 공룡능선과 작별합니다.
대학에 합격하면 큰 아들과 다시 한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피곤에 지친 몸을 버스에 의지한 채 꿈속으로 빠져듭니다.